맹사성 고택

Korea/Architecture 2010. 11. 23. 19:14 |
참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이름만 치면 정보가 주루룩 나온다. 그래서 검색해봤다.


맹사성 [孟思誠, 1360~1438] 

본관 신창(). 자 자명(). 호 고불() ·동포(). 시호 문정(). 온양() 출생.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을 거쳐 전의승(기거사인(우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원판관(
내사사인()·예조정랑(시어사()·간의()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우산기상시()가 되었다. 1406년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使) 시종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되었다.

1408년 대사헌에 오르자 왕의 허락도 없이 부마 조대림()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로 유배되었으나, 영상 성석린()의 변호로 풀려나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거쳐 1416년 판서()로 승진, 호조()·공조()를 거쳐 1419년(세종 1) 이조판서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425년 좌군도총제부판사()로서 성절사(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가 되고, 1427년 우의정에 올랐다.

1429년 궤장(几)을 하사받고, 이듬해 《태종실록()》을 감수, 1431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를 겸임, 《팔도지리지()》를 찬진()하고 1435년 노령으로 사임하였다. 황희()와 함께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고, 성품이 청백검소하여 남루한 행색으로 수령()의 야유를 받았는데, 도망하던 수령이 관인()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또
청백리로 기록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시가()》가 있다.

 


업무차 한 곳을 들렀다가 3시경 일을 끝내고 짧은 해를 불안해하며 급히 이 곳으로 차를 몰았다. 도착한 시간은 3시 20분경쯤. 이 날(2010년 11월 21일 일요일)은 하늘이 흐렸다. 해는 벌써 넘어갈 태세인 것이 도시보다도 훨씬 짧은 체감시간을 보인다.




난 마당에 관심이 많다. 마당넓은 집이 좋고, 마당이 있다면 하고 싶은 일도 많다. 잔디가 촘촘하여 밟기조차 부담스러운 마당보다는 싸리비질로 버석거리는 빈 공간이 좋다. 때로 이끼가 낄 수 있겠고, 때로 먼지가 날릴 수도 있겠고, 또 때로는 마당주위로 듬성듬성 심은 나무의 잎들이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 비가 내리면 적당히 촉촉해지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살짝 패이기도 하는 마당. 손님이 오면 포를 깔거나 평상을 옮겨와 놓을 수도 있는 마당.


어떤 장소에 대해 알고 싶다면 사실 그 곳에 가보지 않고 앉아서 검색하는 것이 효율면에서는 월등하다. 사진도 무수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느끼는 것은 공감각적인 과정이다. 또한 날씨, 만난 사람들 등 여러가지 조건들로 인하여 그 곳의 인상은 철저히 주관적이 것이 된다.  이 날 나는 앞뜰 한켠에서 타고 있는 한 무더기의 낙엽냄새를 맡으며 이 곳을 보았다. 흐린 하늘의 습기와 축축한듯한 낙엽 타는냄새는 전시관 앞뜰에 쌓인 붉은색 단풍낙옆들과 기막힌 조화를 이루었다.


이 곳에는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다. 고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살림집 마당을 지나야 한다.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겠지만, 이러한 구조를 미리 알지 못했던 내게는 대문을 넘는 일부터가 부담스러웠다. 대문 앞에서 고택 입구를 찿아 잠시 헤메기도 했다. 대문 앞의 소나무는 그 굵기로 미루어 그다지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올라가 굽어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입구를 찿지 못하여 헤메고 있는 동안 마치 성곽처럼 경사지 윗쪽으로 굽이도는 담장을 찍어보았다. 항상 '고택'이라는 곳을 방문하며 느끼는 것이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보인다.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이 곳의 마당 담장 또한 도랑위를 사뿐히 타넘는 곳이 있다. 사진의 담장은 그나마 어깨선정도 높이까지 오지만 구간에 따라서는 배꼽밑까지 오는 곳도 있다. 뭐 훔쳐갈 일이 없으니 도둑 걱정할 일도 없었겠고, 밖의 시선을 막는다는 것은 사실 나의 시선 또한 막는 일이기도 하다.




옛 집의 방바닥에 번떡거리는 비닐장판이 깔려있다. 그냥 종이장판이라도 깔아놓지...
벽지는 나무와 흙벽의 이질재료의 뒤틀어짐을 견디지 못하고 그 이음새를 그대로 드러내며 갈라져있다.



이런 문의 구조를 누가 처음 고안했을까? 그야말로 시스템 창호이다.




위에서 담장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대청마루를 마주한 담장의 높이는 배꼽높이를 밑돈다.
마당 아랫집의 지붕이 살짝 보이며 앞산의 파노라마가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Posted by 徐烏(Slow C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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